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문단 편집) == 결과 == 이 사건으로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내각총사퇴|총사퇴]]를 선언했고 다른 곳도 아니고 국회에서 똥물을 뿌렸으니 당연히 여당에서 구속동의안을 냈다. 구속 직전에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김두한에 대한 징계 논의가 진행되던 중 자진사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사퇴 의사를 밝힐 때에도 특유의 장광설이 발동했는데,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개념과 현실정치'라는 주제였다. 주제 자체만 놓고 보면 상황과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이야기 중간부터 군주제와 공화제의 비교를 시작하더니 결국 [[뇌절|일본 천황제와 막부의 역사적 관계, 일본의 개항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삼천포로 빠지다|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이에 참다 못한 누군가가 "'''[[1절만 하자|신상발언만 하라고!]]'''"라면서 소리를 지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됐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김두한은 특유의 직설적인 언행을 했는데 바로 '[[박정희|대통령]]이 여기에 나왔으면 호되게 한 번 따지고 싶지만'이라는 발언으로, [[역린|당시 사회 정서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대통령을 디스한 것으로 취급됐다.]] 당연히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092300209202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09-23&officeId=00020&pageNo=2&printNo=13825&publishType=00020|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보고받은 박정희는 '''[[격노|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노골적으로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적인 발언을 한 데다가 호되게 따지는 방식마저 충격적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저정도 발언은 민주화 이후 누구나 [[표현의 자유|대통령 욕할 수 있는 시대]]엔 당연시되는 수준이지만, 저 시절은 유신독재가 노골적으로 시행되기 전임에도 군사정권의 냄새가 짙은 시기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여론이 몹시 안 좋았기 때문에 [[언론플레이|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김두한에게 화살을 돌려 여론을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대부분의 여론은 "'''[[사이다(유행어)|김두한이 깡패는 깡패지만 이번 일만큼은 정말 잘했다!]]'''"라는 반응이었으므로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론이 정부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고 김두한을 칭찬하는 쪽으로 기울자 [[신민당(1967년)|신민당]]은 쾌재를 부르면서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아예 김두한을 직접 영입도 시켰다. 덕분에 아주 잠깐 [[자유당]]에 있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늘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을 떠돌아 다녔던 김두한은 정치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당에서 당적을 지닐 수 있게 됐다. 이후 김두한은 1년 정도 수감됐는데, 이무렵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몸을 망쳤으며[*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앞니가 다 뽑혔을 정도였다고 한다.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을 오늘날로 치면 [[국정원]] 따위가 끌고 가 [[고문]]한다는 것 자체가 쇼킹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게다가 국회의장을 역임한 이만섭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똥물 투척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박정희 입장에선 견제 대상인) 김종필의 지령’이라고 보고해 박정희가 ‘김두한이를 데려다 어떻게든 자백을 받으라’는 지시를 했고, 때문에 김두한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 안가 50대의 나이에 급사하는 원인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https://mlbpark.donga.com/mp/b.php?p=91&b=bullpen&id=202001250039346736&select=&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4aXSYtgh3eRKfX2h4a9Sl-Aghlq|#]] 수감 중에 [[할복]]을 시도하는 소동을 벌였다가 곧 얼마 안 되어서 [[고혈압]]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선거 연설 도중 북한 찬양으로 반공법 위반[* 다만 '''[[백색테러|해방 직후 정치깡패 노릇을 하면서]] [[반공주의|무자비하게 공산당을 때려잡았던 김두한의 발자취로 보아 실제로 북한을 옹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위의 국회의사록에 기록된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부에 거슬리는 인사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구속하던게 저 시절이었다. 농담 같지만 실제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라며 잡혀간 사례가 정말 많았다. [[막걸리 보안법]] 문서 참조.], 선관위장 폭행 등으로 재수감됐으며 다시 병보석으로 석방되는 것을 반복했다. 어쨌든 그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이병희(1926)|이병희]] 후보에 약간의 표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또 이 사건은 삼성의 후계구도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의 배경인 [[사카린 밀수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13221|김두한의 오물 투척이 삼성 후계구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